바람에 초여름 냄새가 섞이는 계절이다. 지훈은 늦은 밤 잠들지 못하고 노트북 밝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차곡히 쌓여있는 메일들 틈에서 그저께 수신된 한 통을 조심스레 클릭했다. 발신인의 이름엔 권순영이라는 석 자가 뚜렷했고, 메일 속에는 타지의 풍경들이 가득했다. 스무장이 넘는 사진에 반해 메일의 내용은 딱 한 줄이었다. 



'데려오고 싶다.' 



지훈은 그 한 줄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부끄러운 입꼬리가 위를 향했다. 순영과 지훈 사이의 시차는 고작 두 시간이었으나 그 수많은 두 시간 동안 많은 게 변하고 있었다. 






非密

권순영 이지훈

베터






순영이 떠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다. 떠나기 전 남긴 말은 딱 두 가지였다. 밥 굶지 말고, 아프지 말 것. 지훈은 사실 바람나지 마라, 다른 새끼랑은 술도 마시지 마라, 따위의 말들을 원했는데 뭐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바람이 나더라도 혹은 다른 남자와 몸을 섞게 되더라도 순영은 지훈을 되찾아올 것이었다. 지훈에게는 그런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었다. 어쨌든 간에, 지훈은 순영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밥은 굶지 않았고 몸이 좀 안 좋다 싶으면 약을 챙겼다. 물론 바람도 안 났다. 다른 남자와 술은 마셨지만.



"어떡하지? 응 지훈아?"

"우냐."

"나 이번에도 차이면 어떡해? 진짜 어떡해?"



일 년 동안 말 그대로 많은 게 변했다. 지훈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석민은 대학에 들어갔다. 모두가 그 나름대로의 바쁜 삶을 보내고 있었지만 석민의 삶은 유독 바빠 보였다. 두어 번의 연애를 경험하면서 더 그랬다. 석민은 여자친구와 다툴 때마다 지훈을 불렀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지훈을 술친구 삼는 것이었다. 석민은 매번 차였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너무 착하다는 것이었다. 지훈은 그녀들의 말에 공감했다. 이석민은 착해도 너무 착했다. 그걸 알아서 고마웠다. 



"힘내라."



지훈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석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석민은 지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잇몸이 만개하도록 밝게 웃었다. 소년의 첫사랑은 찰나일 때가 아름다운 것 같기도 했다. 



"왜… 왜 웃어."

"힘이 나서."



징징대던 석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두 팔을 들어 근육을 만들어 보였다. 이것 봐, 나 힘나는 것 좀 봐. 장난스런 석민의 행동에 지훈은 웃었다. 아무 걱정 없는 사람처럼, 배를 잡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 일 년 사이, 지훈에게도 가벼운 웃음이 생겨났다. 그래, 또 차이면 뭐 어떠랴. 사랑은 다시 시작하면 그뿐인데. 눈물까지 내며 웃는 지훈을 보고, 석민은 그런 생각을 했다. 



지훈은 아침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오후엔 카페 아르바이트를, 저녁엔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쁘게 살아갔다. 가끔 잊고 살았던 고모가 생활비랍시고 적은 액수의 돈을 보내주기는 했지만 그 돈을 쓰지는 않았다. 순영은 돈 대신 이것저것 선물이 될 만한 것들을 보내줬다. 이곳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옷과 신발, 향수 … 뭐 그런 것들. 지훈은 해외로부터 배송된 소포를 열어보며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것마저도 권순영다웠기 때문에. 다음 날 순영이 보내 준 새 옷을 입고 출근하면 기분이 좋았다. 괜히 킁킁대며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순영이 조금 더 보고 싶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두 시간의 시차 속에서 연락을 주고 받는 날도 있었다. 메일이나 문자 정도였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은 매우 드물었다. 지훈은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순영의 목소리를 들으면 애처럼 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고 싶다고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개월에 한 번 씩, 전화가 걸려 올 때면 아무 말 없이 순영의 말을 들었다. 순영은 전에 없던 시덥잖은 말들을 곧잘 했다. 예를 들어 오늘 점심으로는 라오스 전통 음식을 먹었는데 먹을 만하더라는 이야기, 어제 만난 사업주의 입냄새가 지독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보고 싶다는 이야기. 지훈은 제 집의 낮은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말 좀 하라고,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순영의 말에는 조그맣게



"나도. 보고 싶어요."



했다. 다행히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몸이 멀리 있는 것은 마음이 멀리 있는 것보다 차라리 나았다. 서로가 서로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그 사랑 하나로, 무너져내렸던 삶을 고쳐가고 있는 중이었다.



순영이 아주 바쁘다는 것은 종종 들려오는 뉴스 덕에 알 수 있었다. 순영은 저 먼 나라에서도 열심히였다. 순영이 라오스로 간 후부터 라오스지부의 성과가 좋다는 이야기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뉴스에 순영의 얼굴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뉴스 기자는 순영의 얼굴이 화면에 비치자 긍정적인 단어들을 나열했다. 지훈은 순영이 자랑스러웠다. 순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문득, 어둡고 차가웠던 순영의 옛 사무실이 떠올랐다. 저 곳의 사무실은 전처럼 어둡지 않을까. 더운 나라니까 전처럼 차갑지는 않을까. 지훈은 순영이 조금 허름하더라도 밝은 사무실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언약 없는 기다림이 마냥 힘들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편의점에 술에 취한 손님이 올 때마다, 레스토랑 복도를 아이들이 뛰어다닐 때마다, 호프집에서 웬 이상한 손님이 술 접대를 부탁할 때마다, 순영의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 날이면 교통카드 잔액도 부족했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고단하기만 했다. 야경이 빛나는 대교를 건널 땐 어김없이 순영의 외제차가 떠올랐다. 그 문에 기대서 저를 바라보던 순영이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그 날도 유독 고단한 하루였다. 정리할 재고가 이상하게 많았고 주말이라 레스토랑엔 가족 단위의 손님이 북적였다.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지훈은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따라 마셨다. 이상하지, 고작 맥주 한 잔으로 취할 리가 없는데, 눈에 헛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바람도 쐴 겸 집으로 걸어가는데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클렉션을 울렸다. 그건 매일 밤 머릿속에 그렸던 차의 모양과 똑같았다. 취했나. 취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지훈."



차창이 내려갔다. 이런 드라마적인 재회를 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진부한 해피엔딩이 가장 좋은 선택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영이 차에서 내렸고 순식간에 눈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 순영의 얼굴은 많이 까매져 있었으며 노란 빛을 띠던 머리는 갈색이 되었다. 그래도 순영의 그 눈빛만은, 지훈을 바라보는 시선만은 변하지 않았다. 지훈은 얼떨떨한 마음에도 그게 재밌어 입꼬리를 올리려다 실패했다. 곧장 순영의 입술이 덮쳐온 것이었다. 이 사람은 참, 눈물 겨운 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둘은 한참을 키스했다. 입 안을 침범하는 순영의 입술이 달고 찼다. 그게 순영의 온도였다. 그걸 지훈은 알고 있었다. 순영의 허리춤을 잔뜩 끌어안았다. 천천히, 몸이 달아올랐다. 



"…못 참겠다."



순영의 그 한 마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했다. 순영은 지훈의 손을 잡고 조수석에 태웠다. 신속하고 정확한 행동이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차 안에서 지훈은 내내 순영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매일을 그렸던 얼굴. 그토록 그리웠던 얼굴. 보고 싶고 보고 싶고 수억 번은 더 보고 싶었던 얼굴. 



차가 멈춘 곳은 호텔이었다. 지훈은 그 호텔을 기억하고 있었다. 순영과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날,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냈던 날, 순영이 데리고 왔던 호텔이었다. 순영과 지훈은 방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잡아 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순영이 하도 저를 바라보지 않아, 나 좀 봐 주세요, 하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기도 했다. 지훈의 두 눈은 단 한 순간도 다른 곳을 향하지 않고 오로지 순영만 바라봤다. 그러나 지훈을 바라보지 않는 데에는 순영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한 마디로 일촉즉발이었다. 일 년 넘게 그려왔던 상대가 눈 앞에 있는데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걸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순영은 호텔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 잠, 깐만요…"



지훈에게 다시 한 번 키스했다. 순영은 지훈에게 쉽게 다가가서 지훈을 쉽게 흥분시켰다. 지훈을 안아 들고 침대에 옮기는 동안에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지훈에게는 순영의 모든 손길이 전부 다 애무였다. 순영 자체로도 충분히 치명적이었다. 등 뒤로 푹신한 매트리스가 느껴지자 지훈은 그때에서야 순영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나한테서, 술 냄새 날 텐데."



지훈의 답지 않은 걱정에 순영은 귀엽다는 듯 눈을 휘어 웃었다. 



"술 냄새 빠지는 거 안 좋아하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혀를 섞었다. 타액 섞이는 소리가 호텔방 안에 가득했다. 순영은 빠르게 지훈의 옷을 벗겼고 지훈을 애무했다. 지훈은 숨기지 않고 신음을 냈다. 순영의 입술이 닿는 것만으로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사를 마친 뒤 둘은 맨몸으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처음이 아니었는데도 꼭 처음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부끄럽고, 또 좋았다. 지훈의 작은 몸이 순영의 품 속에서 항해하는 중이었다. 온 마음이 떠다녔다. 콧바람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둘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짜 연인처럼.



"언제 왔어요? 깜짝 놀랐잖아."

"일이 잘 풀려서 빨리 들어왔어. 악착같이 일했거든. 이지훈 보고 싶어서."



순영의 대사는 늘 지훈을 떨리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훈은 순영의 가슴께에 얼굴을 부볐다. 그리웠던 냄새가 났다.



"내일은 같이 바다에 갈까."



순영이 지훈의 얼굴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한없이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두 시간이라는 시차와 일 년이라는 시간을 타고 순영이 돌아왔지만, 생각보다 변한 건 많지 않았다. 



"같이 가기로 했었잖아, 돌아오면."

"근데, 나는…"



목소리는 속삭임이 되고 속삭임은 고백이 됐다. 지훈의 눈동자에 순영이 들어찼다. 무언가가 자꾸만 지훈의 가슴께를 간질였다. 지훈이 고개를 들어 순영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이미 바다 같아요."



둘 중 그 누구도 울지 않는 밤이었다.



"가슴이 자꾸 출렁거려요."



숨겨두었던 비밀의 고백들이 나부끼는 밤이었다.



"사랑해서 그런가."



이제 남은 비밀은 없었다. 둘은 맨몸이 되어 다시 사랑을 나누었다. 몸을 섞고 키스를 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非密

④ 없을 비, 비밀 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