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지훈의 몸은 조금 더 뜨거워졌다. 찬 바닷바람을 쐬며 한참을 운 탓인 듯했다. 순영은 휘청이는 지훈을 안아들고 침대에 눕혔다. 그러는 와중에도 지훈의 얼굴은 붉었다. 열 때문인지 키스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열 때문인지 고백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픔 때문인지 사랑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순영의 목소리에는 숨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지훈은 이불을 곱게 덮어주는 순영의 손을 붙잡고 싶었으나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먼저 도망간 것은 저인데, 무슨 자격으로 불안에 떠는 것인지 몰랐다. 지훈은 멀어지는 순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혼자 두고 가지 말라 부탁한 것은 순영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대로 저 멀리 사라질 것 같은 뒷모습이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눈꺼풀이 감겼다. 지훈은 순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에 들었다.
꿈을 꿨다. 꿈 속에서 지훈과 순영은 서로를 사랑했다.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았다. 허름한 골목의 좁은 집이었다. 지훈은 그 곳이 어딘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 집이었다. 지훈의 집에서 지훈과 순영은 함께 살았다. 순영은 그 낡은 집과 어울리지 않았다. 실밥이 풀린 이불을 덮으면서도 순영은 값이 나가는 수트를 입고 있었다. 잠 속에서 지훈은 순영의 수트가 구겨질까봐 걱정했다. 순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구겨져선 안 되는 사람. 늘 보석처럼 빛나야 하는 사람. 값비싼 사람. 지훈은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채로 순영의 옆에 누웠다. 배경은 여름이었다. 어두운 방, 이불 속에 함께 자리잡은 둘 옆에서 모기향 냄새가 지독했다. 달달달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도 들렸다.
지훈아, 저 별 보여?
꿈 속의 순영이 천장을 가리켰다. 분명 집 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밤하늘이 찬란했다. 꿈 속에서는 그 찬란한 별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 누워 아이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순영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꿈 속에서는, 모든 게 당연했다. 지훈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순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별은 이 집이랑 안 어울려.
순영이 말을 마치자 반짝이던 밤하늘이 새까맣게 점멸됐다. 그제서야 천장다운 천장이 나타났다. 지난 여름 죽은 모기의 피얼룩이 묻어 있는 낡은 천장이 나타났다. 순영은 몸을 모로 돌려 지훈을 바라봤다. 아주 자연스럽게 지훈도 몸을 옆으로 뉘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순영은 살금살금, 지훈에게로 더 가까이 움직였다. 이마가 닿았고 콧망울이 닿았다. 입술이 닿기 전에 순영이 지훈을 불렀다. 지훈아.
지훈아. 우리가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키자 순영의 차가운 손이 지훈의 뜨거운 볼 위로 올라왔다. 순영이 다시 한 번 지훈을 불렀다. 지훈아.
그래도 넌 나를 사랑하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순영이 웃었다.
나도. 그러니까,
지훈은 순영의 손 위로 제 것을 겹쳤다.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지훈아."
저를 흔드는 손길에 지훈은 눈을 떴다. 순영이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같은 사람인데도 꿈 속의 순영과 현실의 순영은 다른 모습이었다. 셔츠 팔을 걷어부친 순영의 무릎에는 죽과 약이 담긴 쟁반이 놓여 있었다. 지훈은 퉁퉁 부은 눈을 꿈뻑거리다가 무거운 상체를 일으켰다.
"죽 먹어."
순영은 쟁반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죽을 한 숟갈 떠서 직접 바람을 불어 식혀주었다. 좋은 꿈이었을까 나쁜 꿈이었을까. 불행한 꿈이었을까 행복한 꿈이었을까. 눈 앞으로 다가온 수저를 보며 지훈은 그런 생각을 했다. 가슴이 조금 아팠다. 순순히 죽을 받아 먹자 조금 아팠던 가슴이 많이 아파졌다. 저도 모르게 작은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오듯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이불깃을 적셨다.
"지훈아."
지훈은 울면서 오물거리던 죽을 목구멍으로 몽땅 삼켜버렸다. 입 안이 뜨거워졌다. 목 깊은 곳에서부터 뜨끈거리는 김이 서렸다. 지훈은 소리 내어 울고 싶은 것을 참았다. 머릿속에서 자꾸만 꿈 속의 순영이 떠올랐다. 우리가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넌 나를 사랑하지? 지훈은 계속 울었고 순영은 들고 있던 수저를 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지훈아, 왜 울어. 아파?"
순영의 손이 지훈의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뜨거웠다. 지훈은 순영의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참아왔던 눈물이 솟구치듯 쏟아졌다. 지훈은 순영의 물음이 너무 상냥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참아왔던 흐느낌이 목을 타고 흘렀다. 처음 듣는 순영의 다정한 물음과 꿈 속 순영의 이해할 수 없는 물음이 겹쳐졌다. 꿈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순영은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했다. 지훈은 제 이마를 짚고 있는 순영의 손을 잡아내렸다. 지훈의 손이 뜨거워서인지 순영의 손이 차가워서인지, 감각이 뚜렷했다.
"…안 갈게요."
흐느낌이 섞인 지훈의 목소리가 퍽퍽하게 갈라졌다. 한 손으로는 순영의 손을 잡았고, 다른 손으로는 흐르는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아냈다.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뜨면 순영의 모습이 보일 테고, 순영을 보면 더 서럽게 울어야 할 테니까.
"안 갈 테니까 … 나 좀, 꽉 … 잡아주세요."
눈물로 잠긴 눈 바깥으로 순영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순영은 지훈이 잡고 있는 손을 고쳐 잡고 제 품 속으로 끌어당겼다. 울고 있는 지훈을 제 품에 안았다. 순영이 이런 식으로 지훈을 안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훈의 몸은 뜨거웠고 지훈을 쓰다듬는 순영의 손은 다정했다. 지훈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다정함이었다. 그래서 더 울었다. 순영의 옷자락을 붙잡고 내내 울었다.
"지훈아."
"흐으 … 흐윽,"
"넌 늘 우네."
지훈은 한참을 울었고 순영은 한참을 달랬다. 어느 새 둘은 이불 속에서 마주 누워 있었다. 마주 누운 채 순영은 지훈을 안았다. 작은 몸이 한 품에 들어왔다. 힘 없는 손으로 순영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지훈의 모습은 위태로웠다. 순영은 불안했다. 다시 한 번 지훈이 떠나갈까봐 불안했다. 그래서 순영은 지훈의 말대로 꽉 잡았다. 안은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둘은 가까이 있을 때에도 멀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함께 있을 때에도 떨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의 운명이 가까워질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 어울리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 서로를 안았다. 서로의 일부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 전부를 안았다.
지훈은 땀방울에 머리칼이 촉촉해지고 나서야 울음을 멈췄다.
"다 울었어?"
"…꿈을 꿨어요."
"악몽이었나봐."
지훈은 겁에 질린 사람처럼 순영의 품에 고개를 부볐다.
"아까, 울었어요? … 나 찾아오기 전에."
"응."
"왜요."
"악몽 같아서."
지훈은 고개를 들어 순영과 눈 맞췄다. 입꼬리를 미약하게 올리고 순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방이 아주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순영의 두 눈만 유일하게 빛났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그 눈두덩을 쓸었다. 순영의 눈꺼풀까지 떨림이 전해졌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지훈이 말했다.
"나 추워요."
목소리는 조용했고, 거리는 가까웠다. 지훈을 바라보는 순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키스해주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순영은 지훈에게 키스했다. 둘의 만남 중 가장 다정하고 가장 진한 키스였다. 가장 두렵고 가장 긴 키스였다.
非密
① 아닐 비, 가까울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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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